작사가


이번 「Musicman's RELAY」은 층쿠상 소개로, 작사가 아키모토 야스시상의 등장입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방송작가로서 활약하고, 『더 베스트 텐』 등 많은 방송 구성에 관여해온 아키모토상. 83년 이후로는 작사가로서, 미소라 히바리의 「강물의 흐름처럼」을 비롯해 많은 히트곡을 만들었습니다. 또, 아이돌 그룹 "AKB48" "SKE48" "SDN48"의 총합 프로듀서로서도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 교토조형예술대학 부학장도 맡고, 게다가 TV 방송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입니다』등의 기획 구성, 신문·잡지의 연재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강물의 흐름처럼」의 탄생 비화부터 히트를 만드는 방법, 그리고 현재의 음악업계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10년 5월 13일 / 아키모토 야스시 사무소에서]


프로필

秋元 康(아키모토 야스시)

작사가


고등학생 때부터 방송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더 베스트 텐』 등 많은 방송구성에 관여. 83년 이후, 작가사로서, 미소라 히바리 『강물의 흐름처럼』를 비롯, 나카시마 미카 『WILL』, EXILE 『EXIT』외, 많은 히트곡을 탄생시켰다. 08년 11월, 제로 『해설[각주:1]』로 제41회 일본 작사 대상 수상. 09년 12월, 제51회 일본 레코드대상·특별상을 AKB48과 함께 수상. 10년 3월, 와타나베 신상을 수상.

91년, 마츠자카 케이코·오가타 켄 주연 『굿바이 마마』로 영화감독 데뷔. 기획·원작의 영화에 『착신아리』시리즈 등.

2005년 4월, 교토조형예술대학 교수 취임. 2007년 4월, 동대학 부학장 취임.

TV 방송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입니다』등의 기획 구성, 신문·잡지의 연재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 중. 아이돌 그룹 "AKB48" "SKE48" "SDN48"의 총합 프로듀서도 맡았다. 올 6월, 일본방송작가협회의 이사장에 취임.

저서 『일생을 맡길 수 있는 「가치 있는 남자」를 판별하는 법』(코단샤+α문고), 『「선택받는 여성」에는 이유가 있다』(청춘출판사), 『아저씨 생활기록부』(카도카와서점), 소설 『코끼리의 등』(후소샤), 『기획 뇌』(PHP문고) 외 다수.



1.도쿄대 입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관료를 목표로 했던 학창시절


― 이번엔 층쿠상이 소개해주셨는데, 층쿠상과 만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아키모토 : 층쿠와는 방송에 같이 나오고 하는 동안에, 어느샌가 친해져있었네요. 층쿠가 오냥코클럽을 아주 좋아했다고 들어서, 모닝구 무스메를 만들었을 땐 엄청 응원했습니다. 당시 제가 TBS에서 「우타방」이라는 방송을 시작했을 때라, 모닝구 무스메에게는, 굉장히 신세 졌습니다.


― 프로듀서로서의 층쿠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아키모토 : 그는 천재 프로듀서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코무로 테츠야, 층쿠, 코바야시 타케시는 천재네요. 곧잘, 오냥코클럽과 비교되는데, 층쿠는 뮤지션이니까 압도적으로 음악성이 높아요. 유행하는 음악을 재빠르게 받아들이고, 모닝구 무스메를 들었을 때 대단히 음악성 높아서 역시 뮤지션이 프로듀스하는 아이돌 그룹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아키모토상 본인에 대해 묻고 싶은데, 출신은 어디입니까?


아키모토 : 메구로구의 오오하시입니다. 당시의 오오하시는 아직 도덴[각주:2]이 달리고 있었지요.


―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입니까?


아키모토 : 맞아요. 올림픽 전이니까.


― 어떤 가정이었습니까?


아키모토 : 평범한 샐러리맨의 장남으로, 남동생이 한 명 있습니다.


― 오오하시에는 몇 살까지 사셨습니까?


아키모토 :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쯤이네요. 당시 소아천식을 앓고 있어서 공기 좋은 곳으로 가자고, 호야시(현:니시도쿄시)로 이사했습니다.


― 소년 시절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아키모토 : 초등학생 때는, 공부만 했네요. 공부 잘하는 아이였으니까.


― (웃음).


아키모토 : 중학교 수험 공부를 하려고 학원에 다녔습니다. 당시엔 아직 그렇게 중학교 수험이 왕성한 시대도 아니었는데, 카이세이 중학교, 카이세이 고등학교 나아가, 도쿄대학에 가려고 했으니까 하여튼 공부했습니다. 몸이 약한 것도 있어서, 비교적 밖에서 야구를 하기보다는 공부하는 타입의 아이였습니다. TV를 본다든가, 음악을 듣지도 않았네요. 다만, 중학교 수험에 실패하고 공립 중학교에 가고부터는 「최종적으로 도쿄대에 가면 돼」라고 생각해서, 전혀 공부하지 않고 놀았습니다.


― 초등학교 때와는 정반대네요(웃음).


아키모토 : 어쩌면 그때 음악이나 놀기에 눈을 뜬 걸지도 모르겠네요.


― 당시 도쿄대에 들어간 이후의 일은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아키모토 : 도쿄대 이후 대장성(현:재무성)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 만약 대장성에 들어갔다면 인생이 바뀌었겠네요.


아키모토 : 그렇죠. 저는 「반바지의 좌절」이라 부르고 있는데, 학원에서는 무조건 붙을 거라 그러고, 모의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이었는데, 그런데도 수험에 떨어진 것이 굉장히 쇼크였습니다. 세상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할까, 운이 굉장히 크다고 느꼈네요.


― 어린 마음에 큰 좌절을 맛보고 말았다는 거네요. 그 후엔 츄오대학 부속고등학교에 가셨네요.


아키모토 : 네. 어쨌든 부모님이 대학교 부속 고등학교라고 해서 들어갔고, 당시 남고고 사복이었기 때문에, 친구랑 놀기만 했네요.



2. 엉뚱한 계기로 고등학생 신분으로 작가 데뷔


― 아키모토상은 고등학생 때부터 작사로서 일을 하셨지요. 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아키모토 : 고등학교 2학년 때 이제 슬슬 공부하지 않으면 도쿄대에 못 갈 것 같아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틈틈이 라디오로 듣던 라디오 드라마 같은 걸 저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원고지를 사서 쓰고 라디오국에 보낸 게 방송작가가 된 계기네요. 원고를 보냈더니 「놀러 와」라고 그래서, 닛폰방송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하고, 카메부치상(카메부치 아키노부씨 닛폰방송 전 대표이사 사장) 같은 분들이 잘 대해주셨어요. 제 방송작가 스승은, 오쿠야마상이라는 분인데, 그 오쿠야마상이 TV 일을 거들게 해주셔서, 그게 『더 베스트 텐』 시작할 때였는데, 그다음에 『벨트 퀴즈 Q&Q』라든가, 아무튼 여러 방송을 했네요.


― 간단하게 말씀하시는데, 평범한 고등학생이 라디오에 좀 투고한다고, 좀처럼 그렇게 되진 않을 거라 생각하고, 그대로 TV 일로 이어지지도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키모토 : 그건, 아마 가장 어리고 재밌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네 무기는 뭐냐」라고 어린 스태프에게 자주 묻는데, 당시 제 무기는 '젊음'이었다고 생각하고, 라디오를 할 때도 청취자와 동세대였으니까 가장 청취자에 가까웠습니다. 대학생이 되고부터 TV 방송을 할 때도, 가장 어렸으니까, 이러쿵저러쿵 제멋대로 말했네요.


― 어떤 의미에서는, 앞뒤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까, 그 세계에 들어가 있었네요.


아키모토 : 저는, 그 후 대학에 돌아가려 했으니까, "지킨다"라고 할만한 게 없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 역시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도, 좀 겉도는 존재였습니까?


아키모토 : 별났었겠지요. 학교에 가도 계속 TV나 라디오 원고를 썼으니까.


― 밑바닥 생활을 안 하고, 갑자기 프로의 세계에서 대활약하게 돼버리셨네요.


아키모토 : 그렇죠. 그러니까 TV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그랬던 게 아니었는데, 하기 시작해서, 재밌다고 느껴서 계속했을 뿐이라, 아르바이트 감각이었습니다.


― 아르바이트라 해도, 하는 동안에 괜찮은 수입을 얻지 않았습니까?


아키모토 : 「들어와버렸다」란 느낌이네요. 다만, 아버지가 샐러리맨이었으니까, 경제관념을 뒤흔드는 일은 없었습니다. 제 벌이는 공돈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가 버는 100만과 제가 버는 100만은 다르다고 생각했으니까. 우연히 들어간 파친코장에서 구슬이 엄청 나온 것 같은 거니까, 구슬이 없어지면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 결국 대학엔 몇년까지 다니셨습니까?


아키모토 : 기억이 잘 안 나는데, 5~6년은 틀림없이 갔었습니다. 적만 두고 있다는 느낌이었네요. 그 도중에 어떻게 해도 TV 원고 마감과 학교 리포트 마감이 겹쳐서 몇 번이나 불려가서 「어쩔 거야」란 말을 듣고, 그 단계에서 자퇴서 내야겠다 생각하고 대학을 관뒀습니다.


― 처음엔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것을 어느 시점에서 직업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아키모토 : 줄곧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카메부치상이 「작사해보는 게 어때」라며, 후지 퍼시픽의 아사츠마상(아사츠마 이치로씨 후지 퍼시픽 음악출판 대표이사회장)을 소개해주셔서, 가사도 쓰게 됐는데, 그래도 진짜 프로 작사가가 되고 싶다고도, 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호기심 끝에 운이 있었을 뿐이에요.


― 작사가로서 최초의 히트작품은?


아키모토 : 제일 첫 히트곡은, 이나가키 쥰이치의 『드라마틱 레인』이랑 나가부치 츠요시의 『GOOD-BYE 청춘』이네요. 저는 『나가부치 츠요시의 올나이트 닛폰』의 구성을 했었는데, 나가부치의 『쥰코』가 대히트했을 때 다시 만나서 「뭔가 같이 하자」고 이야기가 돼서, 그가 주연한 『가족 게임』이란 TV 드라마의 주제가가 『GOOD-BYE 청춘』이었습니다.

 『드라마틱 레인』도 츠츠미 쿄헤이 선생님의 곡이 먼저 완성돼있어서, 그 곡에 맞춰서 몇 명인가 작사가가 가사를 쓰는 공모로, 운 좋게 제 것이 채용됐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작사가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방송작가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더 베스트 텐』이나 TV, 라디오 대본을 쓰고 있으면, 가수분이나 매니저랑 친해져서 「콘서트 구성이나 연출해주지 않을래」라고 이야기가 돼서, 그것도 재밌을 것 같으니까 해볼라든가, 계속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 능동적으로 「이 일을 따내서 하자」는 건 없었습니까?


아키모토 :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미소라 히바리상 때도 컬럼비아에서, 죽은 호리에 시노부쨩의 프로듀스를 하고 있어서, 그때 컬럼비아 측 사람이, 당시 오냥코클럽이라든가, 톤네루즈가 엄청 기세가 좋았으니까, 「다음엔 뭘 하세요?」라고 물어봐서, 「작사가가 된 이상 역시 미소라 히바리상과 일해보고 싶어요」라고 했더니, 그 이야기를 히바리상의 스태프분에게 얘기해줘서 프로젝트가 시작됐습니다. 그러니까 「시켜주세요」라는 식으로 뭔가를 한 적은 별로 없네요.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때그때 꼭 도와주시는 선배나 스태프분들이 계셨고, 찬스를 주셨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이, 「인생에 쓸데없는 건 없다」인데, 도미노가 쓰러지듯 누군가와 만나고, 그게 또 다음 도미노를 쓰러뜨리고…하는 식으로, 인생이란 건 전부 연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3. 이주한 뉴욕에서 써낸 '강물의 흐름처럼'


― 톤네루즈의 두 분과는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아키모토 : 28~29년 전, 니혼TV의 『모닝 샐러드』라는 방송 구성을 담당했었는데, 선배 방송작가가 웃음을 넣자고. 그래서 「지금『개그 스타 탄생』에서 계속 이기고 있는"톤네루즈"가 웃긴 것 같으니까 만나고 와」라고 해서, 니혼TV 리허설실에 톤네루즈 둘을 불러서 개그를 봤는데, 엄청 웃겼어요. 그래서 그들이 그 방송에서 코너를 갖게 됐고, 같이 술 마시고 놀고 하는 사이에 후지TV에서 『올나이트 후지』가 시작돼서, 거기 고문으로 들어갔을 때 「톤네루즈라는 재밌는 콤비가 지금, 니혼TV 아침 방송에서 코너를 하고 있는데, 그들하고 하지 않을래요?」라고 제안했더니, 디렉터 미나토 코이치상(후지TV)이 받아줘서, 거기서부터 톤네루즈붐이 일어났지요.

 그 『올나이트 후지』가 꽤 화제가 돼서, 올나이터즈로 노래를 냈더니 잘 팔려서, 그래서 다음엔 여고생 스페셜을 했어요. 그 여고생 스페셜이 흥해서, 그럼 저녁에 방송을 하자고 시작한 게 『저녁노을 냥냥』인데, 오냥코클럽으로 이어지지요. 자꾸 제가 오냥코클럽을 만든 사람이라고 하는데, 제가 만든게 아니라, 후지TV의 카사이상(카사이 카즈니씨)과 이시다상(이시다 히로시씨), 미나토상이 만든 걸 구현하는 게 제 역할이었습니다.


― 아키모토상은 오냥코클럽이 대세일 때 뉴욕에 가셨지요. 잘 나가는 시기에 왜 일본을 떠나셨나요?


아키모토 : 당시 20대 후반으로 「SOLD-OUT」이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거기에 『TRICK』과 『20세기 소년』를 찍은 츠츠미 유키히코라든가, 다들 동료를 모아서 자기 좋을 대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오냥코클럽이나 아이돌의 곡이, 오리콘에 몇십 곡이나 랭크 인하고, 이제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가 돼서. 나는 아르바이트로 한 건데, 「일이 커졌네」란 느낌이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아마 들떠서, 치켜세워지고 떠받들어지다 끝나겠다 싶어서, 일을 전부 관두고 뉴욕에 갔어요.


― 『강물의 흐름처럼』은 뉴욕에서 쓰셨지요.


아키모토 : 맞아요. 결국 뉴욕에는 1년 반 정도 있었는데, 1년 정도 지나고 점점 고향 생각도 나고 그래서,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31번가에 있는 콘도미니엄에 살고 있었는데, 그 방 아래 이스트강이 흐르고 있어서, 그걸 바라보면서 「이 강을 계속 가면 바다로 이어지고, 그 바다는 일본으로 이어지겠지」라든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일본에서 히바리상이 도쿄돔에서 불사조 콘서트를 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서둘러 돌아오라고 이야기가 돼서, 도쿄에 돌아가서, 도쿄돔에서 히바리상과 만나 뵙고 프로젝트가 재개됐어요. 당시 30대 작곡가로 엔카를 써본 적이 없는 고토 츠쿠토시나 다카하시 켄, 하야시 테츠지상에게 곡을 발주하고, 다시 뉴욕에 돌아가는데, 뉴욕에 보내온 미타케 아키라의 멜로디 테이프와 소니의 워크맨을 들고, 카페·란테르나(La Lanterna Caffe)라는 당시 저희 아지트였던 카페에서 가사 쓴 게 『강물의 흐름처럼』이에요.

 그토록 파란만장한 반생을 보내신 미소라 히바리상 같은 분이, 「당신, 인생 별거 아니야. 괜찮아」라고 말해주면 격려가 되겠지. 그런 응원가를 써야겠다 생각했는데, 그 곡을 듣고 첫 줄에 쓴 게 「강물의 흐름처럼」이었어요. 항상, 가사는 전체를 쓰고 나서 마지막에 제목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강물의 흐름처럼」이란 제목부터 썼어요. 왜 그랬는지 물어도 저는 전혀 모르겠고, 인터뷰 같은 데서 물어볼 때마다 「아마 그건 계속 이스트강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겠죠」라고 답해요. 그 이스트강이 제 안에 스며들어있었고, 그래서 「강물의 흐름처럼」이라고 썼겠지라고.

 그 후, 때마침 도쿄 돌아갔을 때 톤네루즈의 이시바시군이 「아키모토상, 언제까지 뉴욕에 있을 거예요. 이제 슬슬 일본에 돌아오세요」라고 해서, 니혼TV의 『톤네루즈의 생방송으로 느긋하게 가게 해줘!![각주:3]』라든가, 다시 여러 방송을 하기 시작하고 바빠져서 일본에 돌아왔습니다. 그땐 이미 후련해졌다고 할까, 그 미소라 히바리상이 작사가로 인정해주셨으니까, 「프로 작사가라고 해도 괜찮을까?」라고 그때 처음 생각했어요.


― 미소라 히바리상에게 가사를 써드리고 알바라고 하는 건 아무래도 역시 좋지 않지요.


아키모토 : 히바리상에게 작사가로 인정받고, 그걸 불러주신 것이, 어쩌면, 제가 프로가 된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 그렇게 자각할 때까지 꽤 시간이 걸렸네요.


아키모토 : 고등학생 아르바이트 감각이었으니까요. 그때까지, 미국 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공부해야겠단 생각하고 있었고, 한번 더 도쿄대 응시해볼까도 진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내에게도 「공부 다시 할까 해」라고 하면, 「괜찮은데?」라고 해줄 사람이니까, 멀리 돌아서, 자각을 갖게 됐다고 할까요.


― 히바리상은 『강물의 흐름처럼』 가사에 대해 뭐라 말씀하시던가요?


아키모토 : 『강물의 흐름처럼』 녹음할 때, 제 오른쪽 옆에 앉으셔서 「좋은 가사네」라고. 그리고 「인생이란 건 확실히 강물의 흐름 같은 것. 흐름이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하고 꼬불꼬불 구부러지기도 하고 똑바르기도 하고. 그래도, 어떤 강도 같은 바다에 흘러가」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좋은 말씀하시네」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굉장히 깊은 말씀을 해주셨다고 생각해요.

 저는 프로듀서로서 『하하하』라는 노래를 싱글 컷 하려고 진행했는데, 직전에 컬럼비아 직원분한테 연락이 와서 「『강물의 흐름처럼』을 싱글로 하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왜요? 좋은 곡이라 생각하지만 밋밋하잖아요?」라고 했더니, 「히바리상이 무슨 일이 있어도 『강물의 흐름처럼』을 싱글로 하고 싶다고 하셔요」라고. 히바리상은 컬럼비아에 재적하면서 1번도 자기 의견을 말한 적이 없었다네요. 항상 스태프가 정한 일에 「알았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자기 의견을 말하고 싶다고. 그래서 『강물의 흐름처럼』 싱글 컷이 결정됐어요. 그 곡에는, 뭔가 운명적인 걸 느껴요.



4. 「히트는 노릴 수 있어도, 스탠더드는 만들 수 없다」


― 지금은 『강물의 흐름처럼』은 일본 스탠더드 송이 됐지요.


아키모토 : 당시에 어딘가 자만하고 있었고, 히트는 언제든지 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강물의 흐름처럼』 때 깨달은 건, 「히트는 노릴 수 있어도, 스탠더드는 만들 수 없다」는 거예요. 히트라는 건 노려서 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스탠더드라는 건 결과니까요.


― 실제로 스튜디오에서 들은 히바리상의 노래는 어땠나요?


아키모토 : 그 정도로 노래 잘하는 분이 2주간 집에서 연습해오세요. 그건 완벽해요. 프로는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레코딩 스튜디오에도 긴장감이 넘쳐서, 예민해져요. 아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 센터 핀이 조금 엇나간 것만으로도 스태프가 제외되고, 5분 지각하면 제외된다 같은 얘기를 컬롬비아 사람한테 들었으니까. 저희는 5분 늦든, 작은 실수에도 용서하는 건, 자신도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안이함이잖아요. 히바리상은 그런 엄격함을 스태프에게 적용함으로써, 실은 자기 자신이 가장 괴롭고,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몰아넣고 있었어요. 히바리상은 도쿄돔에서 40곡 가깝게 부르면서 가사를 한 군데도 틀리지 않아요. 그 프로 의식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히바리상과 일하게 되면서, 「프로란 무엇인가」라는 걸 배웠어요.


― 히바리상은 그 레코딩으로부터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지요.


아키모토 : 그렇죠. 엄청 충격이어서, 밤중에 전화받고 바로 아오바다이의 댁까지 갔어요. 자는 것 같은 정말 온화한 얼굴이었어요.


― 본인께선 어느 정도 자신의 임종을 알고 계셨을까요?


아키모토 : 어떨까요. 그건 저도 알 수 없네요. 저희나 작곡가진은, 히바리상이 건강해지셨으니까 프로젝트를 재개할 거라고 들었을 뿐이라, 건강해지셨다고 믿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만약 그런 걸 느끼고 있었거나, 뭔가 조짐이 있었으면 『강물의 흐름처럼』은 쓸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해요.

 제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그때 히바리상의 프로의 일을 똑똑히 보고, 「당신은 충분히 프로잖아?」라고 질책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그때 대학에 돌아가야겠단 생각이나 망설임이 사라졌고, 이 '파친코'는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좋을 때만 치고, 더 안 나오면 그만두는게 아니라. 그저 행인지 불행인지, 이제 곧 구슬이 다 떨어지네라고 생각하면 다시 또 무언가로 구슬이 나오고.


― 그래도 옆에서 보면 아키모토상의 구슬이 없어질 것 같은 때 같은 건 상상이 안 돼요.


아키모토 : 별로 생각하지 않아요. 토머스 에디슨의 격언으로 「성공은 99%의 땀과 1%의 재능이다」라는게 있는데, 저는 「98%의 운과 1%의 땀과 1%의 재능」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결코 재능이나 노력을 얕보는게 아니고, 역시, 그 2%가 없으면 100%는 될 수 없으니까,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은 엄청 노력하네」라고 생각해도 그게 보답받지 못하거나 「엄청 재능 있네」라고 생각해도 꽃 피지 못하는 탤런트상을 저는 많이 봐왔어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재능이나 노력이나 땀뿐만 아니라, 뭔가 큰 운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 아키모토상에게는 그 운이 있었다고.


아키모토 : 운 밖에 없어요. 왜 이 사람과 만나고, 왜 이 일을 했을까, 왜 이런 시작이 됐을까같은 건 몰라요. 예를 들면, 제로 일도 그래요. 토다 케이코상의 앨범을 할 땐데, 토다 케이코상의 디렉터가 재밌는 사람인데, 「신인의 가사를 써주실 수 있나요」라고 했어요. 매니저는 「스케줄이 꽉 차서 무리에요」라고 했는데, 저는 밤새우면 되는 일이니까, 승낙했어요. 그런데, 도착한 음악 자료와 사진을 보고, 「이거 잘못됐어」라고.


― 음악이 엔카고, 사진이 흑인이면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요(웃음).


아키모토 : 그런데, 잘못된게 아니라 흑인 청년이 엔카를 부른다고 해서, 이건 재밌다고 생각해서 썼을 뿐이고. AKB48의 경우에도 소극장이라든 록 아티스트가 작은 회장에서부터 조금씩 동원수를 늘려가는 걸 보고, 「부럽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고, 회의에서 「꽂히는 콘텐츠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얘기를 자주 해서, 그 꽂히는 콘텐츠를 만들려고, 때마침 아키하바라에서 동료들과 시작한 일이 지금 같은 형태가 됐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이런저런 일이 결국은 운이고, 진짜 홈런을 노릴 생각으로 친게 아니에요. 재밌으니까 타석에 서야겠다 생각했을 뿐이에요. 오냥코클럽 때도 그렇고, 톤네루즈도 그런데, 인기 있을 거란 생각은 해요. 근데 그 인기가 단타일지, 2루타, 3루타일지, 홈런일지는 몰라요. 다만, 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입장상, 타석에 서면 3할은 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배트를 짧게 쥐고 확실히 치려고 하는 작업 방식을 취하고 있어요. 그래서 홈런은 좀처럼 치기 어려워졌어요.


― 홈런은 노려서는 칠 수 없다?


아키모토 : 맞아요. 오냥코라든가 톤네루즈 때는 기대받지 않았었고, 타석에 서도 3번이나 4번이 있으니까, 「괜찮겠어요? 저 같은 사람으로」라며 힘컷 배트를 휘둘렀을 뿐이니까. 톤네루즈의 『비 내리는 니시아자부』도 오냥코의 『세일러복을 벗기지 마세요』도 그렇게 인기 있을 거라 생각 안 했고.


― 다만 인기가 생기면 그렇게도 안 되지요.


아키모토 : 그렇죠. 책임이 생겨요. 그리고 나이에요. 연령이 높아지면 점점 제가 결정권을 갖게 돼요. 옛날엔 외야에서 「그렇게 하면 안 팔려」같은 말을 했었는데, 점점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돼서 배트를 짧게 쥐게 돼요.


― 일을 하면서, 옛날이 재밌었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었지라고 생각할 때가 있나요?


아키모토 : 그건 있네요.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을 이런 식으로 하고 싶다고 말하면 받아들여지지만, 어느 쪽이 좋은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5.AKB48 스타일을 포맷으로 만들어 세계에 판매


― 아키모토상의 일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일어난 일 하나하나를 즐기면서 해온 것이 결과가 됐다는 건가요.


아키모토 : 맞아요. 결국 모티베이션이 호기심밖에 없어요. 원래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한 거니까. 아르바이트라는 건 아르바이트비로 원하는 걸 살 수 있을 정도 있으면 그걸로 만족하잖아요? 저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으로 따지자면 과분한 돈을 받았으니까, 돈에 대한 집착은 전혀 없어요.

 아키모토 야스시라고 하면 바로 돈에 집착이 있는 것처럼 보는 사람도 있는데, 전혀 없어요. 곡이 히트하면, 「아키모토상은 항상 적중하는 곳에 있네요」라고 마치 우연히 된 것처럼 말해요. 근데 실제로는 결과보다 과정을 좋아해요. 그러니까, AKB48도 안 팔리면 인세가 안 들어오니까, 4년 정도는, 거의 안 들어왔어요. 그것보다도 「재밌네」라고 생각되는게 저한테는 중요해요.


― 세계에서 비즈니스 하기 위해서, AKB48 같은 스타일을 포맷 판매하려고 생각하고 있으신 것 같네요. 처음부터 그런 것도 생각하고 AKB48을 프로듀스 한 건가요?


아키모토 : 아니요, 하나도 생각하고 있지 않고, 뉴욕이나 칸에서 어떤 반응이 있을까 라든가, 그런 흥미에요. 포맷으로 팔 걸 먼저 생각하고, 비즈니스맨처럼, 이걸로 어떻게 수익을 낼까 하는 발상은 전혀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포맷 판매는 아마 90% 잘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10%는 잘 될지도 몰라요. 저희가 학창 시절에 메이저 리그의 타율왕을 다투는 일본인이 나올 거라곤 생각 못 했잖아요? 노모[각주:4] 선수가 메이저 리그에 갔을 때도 「어차피 안 통하잖아?」라는 부분부터 시작된 거예요.


― 승부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거죠.


아키모토 : AKB48의 무대는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하면 처음엔 확 깨요. 물론 JAPAN EXPO 같은 데서 하면 일본의 문화로 평가해주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이렇게 노래와 댄스가 어설픈데 뭘 하는 거야, 이 애들」이라고, 처음엔 멍하게 있어요. 소위 브로드웨이로 대표되는 쇼비즈니스의 사람들이 봤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오디션 이하에요. 그런데 4곡째, 5곡째가 되면 점점 그들이 넘어와요. 정체 모를 에너지를 느낀다고 할까, 「이 애들은 노래와 댄스가 어설픈데, 왜 이렇게 즐겁게 땀을 흘리며 열심히 하는 걸까?」라는 것에 끌린 거겠죠. 저는 여기에 한 번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요.


― 그 한 번의 기회라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아키모토 : 예를 들면, 낫토를 수출하려고 하면, 낫토는 아마 유럽이나 미국 사람에게는 그 구린내나 실처럼 늘어지는 게 썩은 것처럼 보여서 안 되겠지라고 생각해서, 이래저래 가공해서 낫토를 수출한다. 그래서는 안 팔릴 거예요. 저는, AKB48은 낫토는 낫토 그대로 좋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구린내 나고 실이 늘어지고라고, 있는 그대로 전하면, 다들 주뼛주뼛하지만, 충실한 콘텐츠를 재밌어해요.

 어쩌면 AKB48의 노래의 어설픔이나, 댄스의 어설픔을 넘어선 에너지가 좋지 않나 싶어요. 이건 뉴욕에서도 칸에서도 북경에서도 그런데, 그 나라의 말로 가사를 바꿔서 서비스하면 안 먹혀요. 그런 상황을 보면, 낫토는 낫토 그대로인게 지금은 재밌지 않을까 해요. 그것도 저에게 있어서는 호기심이에요. 그렇지만, 이걸 하면 얼마, 이 일을 하면 얼마 하는 계산을 한 적은 없고, 「이건 재밌네」라는 식으로 일을 고르기 때문에 호기심만이 모티베이션이에요.


― 모든 테마는 호기심이 생기는지 아닌지네요.


아키모토 : 맞아요. 그러니까 저는 호기심이 없어지면 일을 그만 둘 생각이에요. 다시 말해서, 돈을 얼마나 준다고 해도, 저는 흥미 없는 일에는 움직이지 않아요. 어떤 회사의 사외 이사를 했을 때도, 「사외 이사는 어떻지?」란 흥미가 있어서 받아들였을 뿐이고, 그건 경험으로서도 재밌었어요. 보통, 그 나이에는 사외 이사가 될 수 없기도 하고. 제 호기심이 상당히 충족된 건, 여러분도 그럴 거라 생각하는데, 사전 협의하려면 우선 잡담부터 시작하잖아요? 그런데, 이사회나 최고경영자 회의는 의장 같은 사람이 있고, 「그럼 제1호 의안부터」라고 시작해요. 그런게 저한테는 엄청 재밌었고, 회의에서 의견을 말해도 저는 말단 임원이라 상대해주지 않아요. 그때 「높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구나. 역시 출세하고 싶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샐러리맨 분들이 출세하고 싶어 하는 기분을 아주 잘 알았어요.


― 참고로 현재 교토조형예술대학의 부학장에 취임하셨지요.


아키모토 : 네. 처음엔 거절하려고 갔어요. 지금 스케줄로 교토에 있는 대학에 왔다 갔다 하는 건 상당히 어려우니까. 그런데, 거절하러 갔을 때 대학 캠퍼스를 걷고 있었더니, 당시의 저 같은 학생이 걷고 있는 거예요. 제가 다양한 기회를 사람들에게 얻어서 살아가고 있는 거라면, 그들에게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타임머신을 타고 30여 년 전의 제 앞에 제가 뿅 하고 나타나서,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힘든 건 힘든 거지만 수락하고, 학생들에게 AKB48 의상 디자인을 받고 있어요. 물론 채용되면 제대로 개런티를 지급하고 있고, 사전 협의에도 되도록 오게 해요. 저 자신, TV 각본 작성법이나, 영화든 커머셜이든 뭐든지 간에 현장에서 배웠어요. 그러니까, 학생들도 될 수 있으면 현장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요.



6. 「모두가 가는 들판에는 산딸기가 없다」


― 장래에 이렇다 할 희망도 전망도 없이 회사에 나가는 현대의 일본 젊은이들에게, 아키모토상이 어드바이스 해주실 건 없나요?


아키모토 : 젊은이에게 한정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이 굉장히 찬스라고 생각해요. 마라톤도 평지에서 추월하려고 하면 빠른 놈은 쉽사리 못 제쳐요. 하지만 언덕길이면 모두 힘드니까 그때 제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취직난이나 기업 상태가 안 좋은 지금이 찬스에요. 만약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면, 거기서 가만히 있어도 찾을 수 없어요. 눈앞에 벽이 있으면 다들 그걸 뛰어넘으라고 하는데, 뛰어넘을 수 없으니까 벽인 거잖아요. 그래도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움직이면, 어떤 벽도 어딘가에 틈이 있으니까. 가장 나쁜 건 거기서 멈춰 서버리는 거예요.


― 뭐든 좋으니까, 일단 움직여보라는 거죠.


아키모토 : 그렇죠. 만약 젊은 사람이고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면,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우선 중국에 가보라고, 중국에서 살아보라고 하고 싶네요. 중국이 아니라도 뉴욕이라도 홍콩이라도 브라질이라도 좋아요. 그러면 뭔가가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 저도 중국 북경에 가서 굉장하다고 생각했어요. 우연히 이야기 나눈 중국분이, 「나는 아버지 시대보다 좋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에게 더 좋은 생활을 하게 하고 싶다」라고 하셨어요. 그런 마음이 지금의 중국 경제를 받치고 있어요. 다 함께 한방을 노리겠어 같은. 일본인처럼 편하게 평화롭게 생계 걱정 없는 인간이 가면 자극받지 않을까요? 결국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른 장소에 가서, 있어보는 건 저는 할만하다고 생각해요.


― 하지만, 다들 「만약 실패하면」 같은 생각을 해버려요. 게다가 지금 같은 시대에는 더더욱 행동하기 어렵죠.


아키모토 : 제 인생에도 두 갈래 길이 많이 있었고, 잘못 선택한 적도 물론 있어요.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됐을 때, 이번엔 틀리지 않으려고 다양한 정보를 모아서 「이쪽이네」라고 생각해도, 또 틀려요, 인생이란. 저도 그런 경험을 하고 알게 된 건, 두 갈래 길이 있을 때는 어느 쪽이라도 좋으니까 어찌 됐든 전력으로 달리는 것. 틀렸다고 생각하면 전력으로 돌아오는 것. 이것밖에 없어요. 「중국에 가보는게 어때요?」라는 어드바이스는 틀렸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가보고, 「틀렸잖아요!」라고 화내고 돌아오는게 중요해요. 다시 말해서, 뭔가 행동을 시작하지 않으면 그것조차 알 수 없는 거니까요. 아마 저는 계속 행동만은 하고 있어요. 그건 틀렸을지도 모르고,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리고, 돈이 들기도 했지만, 항상 행동은 하고 있어요.


― 확실히 앞길이 막막하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지요.


아키모토 : 그리고 주변을 너무 봐요. 바꿔 말하면, 마케팅을 너무 하고 있어요. 마케팅은 과거의 잔상이니까, 마케팅이 끝난 시점에서 1초 후에는 바뀌어있어요. 예를 들면, 꽃가게에서 모두 해바라기를 사는 것을 보고, 「지금은 해바라기가 좋구나」라고, 대부분의 사람은 해바라기를 심어요. 그리고, 1년 후엔 해바라기투성이가 돼요. 사실은 거기서, 민들레를 심은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그렇다는 건, 주위 경치는 하나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휴대폰 콘텐츠는…」, 「iPad 콘텐츠는…」, 「3D는…」이라고, 접시부터 생각하니까 다들 비슷한 게 돼버리는 거예요.


― 본질로부터 벗어나는 것에서 사물이 발전한다는 거네요. 그렇다는 건 음악업계도 역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아키모토 : 음악업계는 패키지 비즈니스 시장이 축소돼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찬스고, 패키지로 재밌는 거라면 팔릴 거라고 생각하고, 물론 흐름으로 보면 음원이겠지만, 답은 분명 정반대에 있어요. 다시 말하면, 모두가 가는 들판에는 산딸기가 없어요. 벌써 다 따버렸으니까. 사람들이 안 가는 곳에, 아직 누구도 따지 않은 산딸기가 있어요.


― 아키모토상은 항상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 모두의 예상에 어긋나는 일을 계속 해오고 성공해왔다고.


아키모토 : 꼭 모두가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깥 풍경보다 제가 보고 싶은 풍경으로 나아간다고 할까요.


― 아키모토상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려고 하시나요?


아키모토 :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면 오늘 누군가와 만나고, 그 이야기가 재밌으면 거기에 어울리기도 하고, 물론 저희 일은 내년에 있을 발매라든가 있으니까, 그런 일은 하고 있지만, 지금 하는 것의 연장이 아닌 일의 미래는 하나도 생각 안 했어요.


― 앞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향에 갈 거란 거죠.


아키모토 : 맞아요. 그리고, 아무리 이런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운수나 운의 바이오리듬이 그렇지 않을 때에는 못해요. 저는 여자를 상대로 하는 강연회에서 「연애는 3번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진짜 사랑이 아니야」라는 말을 자주 해요. 그 기적이란 건 그렇게 거창한게 아니라, 「전화하려고 했더니 걸려왔다」라든가, 「절대 만날리 없는 파티에서 딱 만났다」라든가, 뭔가 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저희 일도 「이런 거 하고 싶네」라든가, 「저거 좋네」라고 생각한 시점에 멈췄을 땐 아마 불리지 않을 거예요. 영화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때마침 우연히 영화 기획이 온다든가, 이런 뭔가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 마지막으로 여쭤 보고 싶은게 있는데, 아키모토상 나름의 운을 불러들이는 방법이 있나요?


아키모토 : 그건 아마 자기가 운이 강하다고 굳게 믿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다를지도 몰라요. 하지만, 자기 안에서는 「운이 좋네」, 「다양한 사람과 만났네」, 「분명 앞으로도 좋은 사람과 만나겠지」라고 굳게 믿는 것. 뭔가를 하려 해서 무리하게 하는 것보다, 반드시 무언가와 무언가가 맞춰지는 때를 기다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요.


― 오늘은 바쁘신 와중에 감사합니다. 아키모토상의 더욱더 많은 활약을 기원합니다.


(인터뷰어 : Musicman 발행인 야시로 타쿠야 / 야마우라 마사히코)


수많은 훌륭한 공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의 끝에 운이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겸허하게 반생애를 들려주신 아키모토상. 이번 인터뷰에서는, 요소요소에 아키모토상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이론이나 명언이 나왔습니다만, 어느 말씀에도 설득력이 있어, 우울한 뉴스가 이어지고 있는 음악업계에, 또 한번 새로운 자극을 주는 건 아닌지 기대가 커지기만 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을 계속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원문 : https://www.musicman-net.com/relay/6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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